알림 - 2013년 4월 2일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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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ㅍㅅㅅ의 미야다이 신지 교수 인터뷰에 대한 비판 잡담



예전부터 미야다이에 비판적인 편이었지만, 이번 인터뷰는 어이가 없다 못해 욕이 나오는 수준. 허구의 세계에 갇혀있지만 말고 밖으로 나오라는 오래된 꼰대 소리를 반복하고 있다.

특정 작품이 대놓고 '현실사회의 언'어를 쓰고 '현실사회적인 설정'을 도입해야만 '사회'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헛소리에서 이미 OMG. 예컨대 그가 예를 든 쉬리의 경우, 현실의 남북관계를 설정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은 '허구'가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케이온'같은 일상물은 (최소한 쉬리보다는) 정말 있을 수 도 있는 이야기니까 논픽션이라고 해야겠네? 허구는 동등하게 허구일 뿐이지, SF나 판타지 설정이 많다고 해서 더욱 허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케이온처럼 비현실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지만 정말 비현실적일 수도 있고,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처럼 동화책같은 설정이 훨씬 현실적 수도 있는 거다. 이런 점에서, 미야다이는 문화작품(예술)의 리얼리즘이 무슨 옛날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같은 맥락에서 그는 개인 내부의 작은 세계와 외부의 큰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설정한 뒤, 오타쿠들은 전자에 몰두하고 있으며 완전한 고립이며 큰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런 관점은 1. 오타쿠들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동질화된 고정 폐쇄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2. 그에 따라 겉보기만으로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으며, 3. 오타쿠는 물론 히키코모리조차도 외부세계와의 접촉없는 내부세계를 가질 수 없다는 '인간본성의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특히 3번에 관련해, 히키코모리란 생활유형이 가능해진 것 또한 인터넷을 통해 외부세계 접촉 기술이 생겨난 이후다. 또 히키코모리화 이전의 생성된 접촉경험, 독서, 취미 등도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히키코모리가 완전히 자기 내부세계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대다수의 오타쿠는 나름의 사회생활과 교류를 한다는 점에서, 오타쿠가 내부세계에만 갖혀서 인식하고 사고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헛소리. 무엇보다 현대인은 (100보 양보해서 최소한 청소년기 전까지는) 화폐로 밥을 먹고 남이 만든 옷을 입고 집에서 산다는 '신체적 존재'라는 점에서 내부세계로 완전히 갇히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가 없다. 오타쿠들이 무슨 무인도에서 자급자족하면서 살고 있나? 다들 똑같은 쌀밥먹고 산다.

정말 순수하게 '이렇게 좋은 세상인데 즐기기만 해야지'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외부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자기 나름대로 치열하게 스트레스 받고 컴플렉스를 껴안고 살고 있다. 또 정반대로, 설령 미야다이의 말이 맞다고 쳐서 오타쿠의 99%가 아무생각도 없이 '안분지족'하고 있다면, 그걸 왜 문제삼나? 자신의 현재에 정말로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을 강제로 '동원'하겠다는 소리인가? 이것이야 말로 꼰대정신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우둔한 오타쿠들에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step1부터 가르쳐 주겠노라, 이 무슨 오만인가. 

정말 쓰잘데기 없어보이는 모에요소 덩어리의 양산형 작품조차도, 오타쿠들이 가지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그 '언어'가 다를 뿐이다. 오타쿠들이 결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사회의 언어이다. 그러나 그 언어에 익숙지 않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런 욕구불만이 없다고 말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익숙한 (하위문화적인) 언어로 계속 불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을 '번역'하는 게, 미야다이같은 학자나 평론가(물론 오타쿠들도)가 해야할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고, '너희는 왜 너희끼리 내가 모르는 말만 하니?'라고 질타하는 건 일종의 주류문화의 언어 제국주의일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미야다이의 주장은, 일종의 언어 강요라는 폭력이 된다. 너희의 욕구와 불만, 외부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내가 알아먹을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 하는한 '없는 취급'을 하겠다. 또 그가 주장하는 외부, 다른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또한 너희가 언어를 바꿔서 말을 걸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물론 모든 교류에는 언어변환(번역)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미야다이는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전가의 보도 '오타쿠 위기론'으로 오타쿠들의 변화를 요구하지만 , 그게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라일지도 지금(이번 인터뷰)과 같은 일방적인 강요에 귀를 기울일 오타쿠는 없다. 그 어떤 변화라도 일방적으로는 이뤄지지 않으며, 상호적으로만 가능하다.

덧붙여. 조금 피상적으로 접근하자면, 오타쿠들은 자신들의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이미 외부의 분야, 장르, 학문을 끌어들이고 있다. 최근 몇년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 중에서, 고전 문학이나 종교, 자연과학(특히 물리학) 레퍼런스를 갖고 있는 작품은 여럿 댈 수 있다. 문명사와 경제를 가져온 '늑대와 향신료'같은 건 어떤가?  미야다이가 쇠퇴를 걱정하지 않더라도, 오타쿠들에는 비오타쿠적인 관심사와 지식을 갖고 있는 오타쿠도 충분히 많고, 모든 오타쿠들은 외부세계와 접점을 통해 자신의 현실감각을 갖고 있다. 





썰전, 겉핥기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문화

4월4일 방송의 전국유료방송기준시청률은 1.758%, 첫 방송에 비해 2배 가까워진 수치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첫방부터 화제를 일으켜 온 결과, 6회 방송까지 순항하고 있고  아마도 이 분위기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듯해 보인다. 그런데 첫화부터 썰전을 챙겨본,청자층을 중심으로 최근 몇 회분 방송 특히 지난 4월 4일 6회차 방송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 사람인데, 그 아쉬움의 표현으로 방송 회차가 거듭되고 인기를 더해감에 따라 빠질 수도 있는 이 프로그램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언급해 보고자 한다. 문제보다는 ‘숙제’라는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프로그램을 두고 걱정부터 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미 지난 방송 속에서 이러한 부분이 살짝 드러나기도 했다는 점에서 아예 의미없는 걱정은 아닐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그냥 수다를 넘어서 ‘평론’이라는 대담한 주제를 안고 있다. 여기서 ‘대담하다’고 표현한 것은, 다른것도 아니고 ‘종편 예능’이라는 입장에서 가장 민감할 수있는 두 가지인 시사(라곤 하지만 제도권 정치의 비중이 크다)와연예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앞 꼭지인 정치 평론 ‘하드코어뉴스깨기’는 ‘종편’이라는점에서 대담함이 두드러진다. (JTBC는 그나마 개중 혐의가 옅은 편이긴 하지만) 종편의 원죄(?)로 늘 따라붙는 인식, 우편향되어 있다는 (최소한 48%의) 인식에 정면승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아예 1대1 균형 구도를 만들어 줌으로서,최소한 기계적으로는 중립적이라는 정당성을 얻었고(민주당보다 왼쪽의 진보좌파적 가치에 대한무시는 여기서 넘어가도록 하자. 중앙일보 방송에 거기까지 바라는 사람은 없을 테니), 내용적으로도 지금까지는 공평함을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평함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계적중립성을 근거로 한다. 대체적으로 반대쪽에 서는 두 사람의 의견을 사안별로 동시에 들려주는 기본에 충실한결과로 나타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의견에 대한 근거와논리 또는 관련 사례 등을 충분히 들려줘야 그들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어느 정도씩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외국인학교 부정입학이나 안철수 출마 등에 대해서 두 패널은 의견을 달리했으나, 서로 여유롭게자기 생각의 근거를 이야기했고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 반면, 충분히 논거가 제공되지 주장만 툭 나오면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다. 특히나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가 근거 없이 제공되면 불쾌감을 느끼고 발언자가 편향적이라고 판단하기 쉽다. 

지난 4월 4일 방송 특히이철희의 발언이 이런 경향이 심했다. 이것이 패널 개인의 문제인지, 편집된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식은 좀 많이 아니었다. ‘MB는 연금을 주는 대신 돈을 내게 하고, 권양숙, 이희호 여사는 연금을 더 줬으면 좋겠다’, ‘부시는 멍청하잖아’같은 발언이 불편하게 들린 것은 표현 자체도극단적이었지만, 아무런 전후 맥락 없이 던져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이 말도 논리적이진 않으나) MB는 돈이 많고, 두 여사분들은남편 여의고 어렵게 사시잖아요’정도의 발언이라도 덧붙이고 부시의 실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었다면, 발언들이 주는 어이없음은 조금 덜했을 테다. 요컨대 이철희 발언이주는 편향성은 단순히 한쪽 편을 들었다는 문제를 넘어, 발언이 ‘피상적’이라는 더 큰 문제의 결과다. 이렇게 의견을 종합적으로, 즉 근거와 이유 등을 들어서 충실히 말하지 않고, 주장만 피상적으로툭 던지다 보면(혹은 주장만 쓱 잘라내서 편집하다 보면) 이런실수 아닌 실수는 자꾸 나올 수 밖에 없다. 패널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방영 초반에 어느정도 유지했던 공평함(의 느낌)은 당연히 점차 줄어들어 들 수 밖에 없으며 이는 프로그램을 장기로 끌고 가는데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프로그램 보기가 불편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갈등’의 문제인 정치시사를 예능으로 다룰 때, ‘나는 꼼수다’처럼 아예 입장을 분명히 하고 충성도 높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한 비판과 풍자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면, 심리적인 공정함을 상당부분 보장하는 것은 필수 조건이다. 나꼼수야 아예 아무리 진행자들 마음대로 자극적으로 발언해도, 듣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기에 그런 방송이 가능했다. 하지만‘뉴스깨기’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TV의 예능프로그램이라는 성격이 있기에 그러기 어렵고, 제작의도도 그런 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런 전제 아래서는, 예능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오히려 분명한 공정함이 없으면 폭넓게 웃음을 주기 어렵다. 어설픈 편향성은 ‘공기’를 불편하게 해, 예전에 웃었던 것도 더 이상 웃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상적인 발언이 방송 속에서 잦아질 수록, ‘권위와 품위가 없다, ‘편향적이다’라는 자연스러운 비판은 받는 것은 물론 예능으로서의 생명력까지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렇게 발언의 수준이 단순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확언할 수 는 없지만, 당장 한가지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친분’의문제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서는, 오해를 사기 쉽기에최대한 친절하고 자세하게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친분이 쌓이고 서로를 점차 파악하게 될수록, 서로 척하면 척하고 알아듣게 된다는 믿음이 생기므로 처음처럼 구구절절 말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다. 문제는 그게 서로 친한 패널들 사이에만 적용되는 ‘친분’이라는 사실이다. 시청자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사람이고 그들에게 이야기를하는 것은 최고 수준의 친절함과 자세함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친분은 넓은 의미에서, 단순히 패널들 사이의 인간적인 적응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방송 자체에대한 적응, 익숙해짐을 포함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강점은사적인 자리에서 나올듯한 분위기와 표현으로 그런 자리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의 ‘썰’을 내놓는데 있다. 그런데 지나치게 편안해져 사적인 자리와 다름없이말한다면(즉 피상적이고 단정적으로), 토크는 포장마차 뒷담화수준으로 되돌아 가게 될 것이다. 

‘하드코어 뉴스깨기’가종편의 입장에서 대담한 시도라면, ‘예능 심판자’는 ‘예능’의 입장에서 대담하다. 예능에서예능(버라이어티를 넘어 넓은 의미의 연예방송 콘텐츠 전반)을다룬 경우는, 다른 토크쇼에나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지나가는 화제로 다소간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아예전면에 내세운 경우는 없었다. ‘뉴스깨기’가 종편프로그램이란 입장을 역이용해 공정함의 토양 위에서 웃음을 노린다면, ‘심판자’의 경우에는 패널들의 ‘전문성’내지는통찰력에 의존하고 있다. 실제로 패널들은 다분히 그러한 의도를 노린 ‘지성파’들로 구성되어 있다. 김구라는 최고의 현직 예능인 중 한 명이고, 박사 개그맨, 대중문화 전문 기자/평론가, 방송욕심이 많은 전직 국회의원 겸 변호사, 발언을 정리하는 데 탁월한전직아나운서까지 다분히 그들의 능력에 의존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중도하차한 홍석천의 경우에도 연예인이면서사회적으로 민감한 경험을 한 당사자로서 존재감이 분명했다).    

실제로 첫 회부터 이런 의도는 상당히 들어맞았다. 정글의 법칙 조작논란을 다루면서는 ‘진정성’의 개념에 대해 철저히 제작자와시청자, 출연자 등의 관점으로 나누어 철저히 분석했고, 박시후사건에서는 연예인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말 그대로 당사자의 입장에서 논했다. 텐아시아 등의 전문비평지, 매체 비평가 또는 인터넷상의 전문가(?)들에게서나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가 예능 방송으로 나오는 것이다. 더욱이 ‘심판자’에서 ‘전문성’을 드러내고날카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바로 그 연예산업계에 속한 연예인들이란 점이다. 방송, 말이라는 생생함과 더불어, ‘당사자’들의 말은 설득력이 더욱 클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출연자들이 나아가 제작진 전부가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문제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이 꼭지의 존재의미이자최대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 장점 때문에, ‘심판자’는 동시에 근본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다. 즉 그 비판이 어느 정도를넘어가게 되면 곧 출연자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허지웅을 제외한 나머지 패널은 모두방송연예계에 종속적인 관계에 있는 전문 방송인인데(강용석도 방송계에서 보폭을 넓히고 싶어하는 욕망이크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그런 입장에서 다른 방송사, 관계자또는 업계 전체를 겨냥해 직접적이고 솔직한 발언을 하는 것은 손해면 손해지 결코 득이 되지는 않는다. 한발더 나아가자면, 대중 즉 시청자에 대한 발언(예를 들어 대중의수준이나 이중성 등을 문제삼는 발언) 또한 추상적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즉 인기를 얻고 시청률이높아질 수록 그렇다. 출연자들은 방송의 영향력이 적었던 초기에는 소신껏 발언하고 덕분에 시청자들의 공감과재미를 줄 수 있으나, 일정 이상의 영향력을 갖게 되면 발언 수위를 조절하게 되는, 일종의 자기 ‘피드백‘의늪에 빠질 우려가 있다. 

더욱이 시청자에 의한 비판, 더 나쁜 경우는 방송연예 관계자에 의한압박이 있을 경우 그런 위축은 더 가속화될 수 밖에 없다. 그런 것이 반복될 경우, 패널들의 발언은 자기 검열을 하게 될 테고 정작 간판에 내걸었던 ‘하이퀄리티 미디어비평’의 수준은 하락되는 게 당연하다. 철저하게분석적으로 이슈를 다뤘던 처음 3회에 비해, 최근 특히 4월 4일의 6회에서는비평의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준이 떨어진다기 보다는 패널들이 방송초기에 보여주었던 날카로움, ‘돌직구’를 아끼는 모습이었다. 허지웅 정도를 제외하면, PPL에 대한 잡담이라든지, 피상적인 배우평, 개인적인 경험 정도가 주로 나열되었다. 실제로 첫회에 비해 뒤로 갈수록 허지웅의 발언 분량의 급격히 늘어났는데, 허지웅의발언 자체도 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패널들의 분석적 발언이 그만큼 줄어든 결과로도 생각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일종의 ‘자기검열’, 지상파에 진출하기 위해 몸을 사리는 것이라면 프로그램의앞날은 어둡다. 

요컨대, <썰전>의두 꼭지를 모두 관통하는 문제는 점차 ‘피상적’이 되어갈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두 꼭지에서 그 맥락은 조금 다르긴 하다.앞 꼭지인 ‘하드코어 뉴스깨기’에서는, 발언이 스스로 자르든 편집으로 잘리든, 맥락과 근거, 설명 등이 생략된 주장만 던져지곤 한다면 ‘피상적’이 되는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도 불편하고, 프로그램의 품위, 신뢰도 떨어뜨리는 문제다. 뒤 꼭지인 ‘예능 심판자’에서피상적이라는 것은, 처음 의도한 방송인과 전문가에 의한 ‘날카로운해부’가 점차 약해서 겉만 다루는 뻔한 비평으로 퇴보할지 모른다는 우려다. 최악의 경우, 서로 몸을 사리고 칭찬과 원론만 주고 받는 방향으로갈 수도 있는 문제다. 공통적으로 이 프로그램의 힘은, '비평'을 간판으로 내건 만큼 예능에서는보기 힘든 ‘깊음’에서 나오는데, 그 깊음을 잃는다는 것은 곧 프로그램의 생명력이 다한다는 뜻이다. 

물론 한달 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썰전>이 망가졌다거나, 장래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난 4월 4일 방영분이다소 실망스러웠다고 해도 여전히 존재가치와 재미가 분명한 방송이고, 그 위력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을것이라고 예상한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어느 프로그램이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썰전의 경우에는, 단기적 시청률의 유혹에 혹해 ‘평범하고 얕은’ 토크쇼로 돌아가는 방향을 택할 때 그 함정이 발동될수 있다. 패널들의 에피소드, 뒷담화 등은 물론 재미있고프로그램의 중요한 요소지만, 그것들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진다면 결국 개인사를 나열하는 흔한 토크쇼와다를 바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깊은 이야기’를 잃지 않고, 초심을 유지한다면 종편 최고의 콘텐츠로 등극할만한가능성이 충분한 프로그램이다.






가정의 이데올로기, 불쌍한 그리고 이기적인 비정상인들 잡담

 

이젠 한 가정을 이뤄 자식 낳고 살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네가 지금 사는 게 정말 사는 거냐고

너처럼 살다가는 폐인될 수도 있다고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난 정상인들 틈에서

순식간에 비정상인으로 전락한다

                                                                          유하 - <달의 몰락>

 

지난 2, 통계청의 2012년 출산율 조사 발표가 있었다. 가임여성 1인당 평균예상출생아 수1.30. 2005 108명으로 최저치를기록한 이후 오르락내리락을 거듭하다 최근 3년은 연속 오름세에 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건조한 스트레이트 기사성 정보다. 그런데 늘상 이런 기사에는진보보수 매체를 막론하고 따라붙는 말이 있다. ‘그나마다행이지만 아직 낙관할 수 없다. 더더더욱 끌어올릴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언론과 정치권, 학계 등에서 2030세대를 삼포세대라바르며 불쌍히 여긴다. 그들의 성향에 따라 힐링을 하려 하든 바리케이트짱돌을 주문하든, 내놓는방법론은 다르지만 연애, 결혼, 출산을 못하는 걸 크나큰 비극으로 여기는 건 공유한다. 그런데 이들의 측은지심은묘하게 조급하다. 마치 원주민이게 전도하려는 선교사처럼, 동정심의뒤편에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 작동하는 듯해 보인다.

앙리 베르그송은,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도덕적 의무에 대해서는 논쟁하지만 도덕적 의무가 왜 존재하는지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서그 밑바닥에 흐르는 것을 두고, ‘사회는 보호되어야 하고, 존속되어야한다는 닫힌 명제라고 덧붙였다. 여기에 중고등학교 사회교과서첫 장에 명시된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요소이자 근간이라는말을 참조한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가정을구성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는 것은 사회를 유지시키지 않으면안 되며 개인은 그 의무에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 말이다.

전통사회에서 가문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의무는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씨받이, 씨내리같은 야만적인(강제적인 성격이라는 면에서) 문화도 횡행하곤 했다. 국민국가가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현대에 이르러서도마찬가지다. 며느리를 두고 콕 집어 압박하는 건 줄었을지 몰라도, 이제는세대 전체를 겨냥한다. 때로는 불쌍한 세대라며 어르고 달래는 한편, 때로는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거부하는 젊은이들(특히 젊은 여성에 대해)이이기적이라며 비난하는 등 독촉하는 건 덜하지 않다. 다만 그 주체가 일’(一家)에서 국’(國家)로 보다 크고 직접적인 단위로 바뀌었을뿐이다.

작년 선거국면을 돌이켜 보자. 진보적임을자처하는 몇몇 지식인들이 박근혜 후보는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고 가정을 꾸려보지 않았으므로 자격미달이라고 공격하곤 했다. 이점에서 이들도 가정을 만들지 못하면(또는 그러지 못하면) 비정상이데올로기에서자유롭지 못하다. 박 후보가 자신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다 여성정책을 잘 펼칠 수 있을 것임을 주장한것도 근거가 없었지만, 그것을 비판한다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점을 트집잡은 건, 별로 수준이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한 꼴이었다. 물론 대다수의갑남을녀는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가지만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해서 정책결정자가 되지 못한다는 건 너무나도 어이가 없는 발상이다. 그런 식이라면, (‘뭐든 해봐서 하는전임 가카 이외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경험이 아니었던 것에 대해서말할 수 없을 테다.

이처럼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적이라 하는 사람조차, 가정 없는 인생에 대해, 사회 재생산에 기여하지 않는 삶에 대해자신도 모르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동성애에 적대적인 여론의 일부에도,동성애의 증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이성부부의 수를 줄이므로 사회 재생산에 해를 끼친다는 인식이 함축되어 있을 터이다. 요컨대 이러한 모든 정서의 배경에 있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회의 유지라는상위 명령에 개인의 삶을 복속시키려는 이데올로기다.

물론 국가의 입장에서 인구급감 등 급격한 사회변화가 초래할 부작용을 막기 위한대책을 세우는 것을 그르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대책은 어디까지나 환경적인 요인을 개선하는 차원의것이어야 한다. 결혼에 드는 비용과 육아의 부담을 줄이고 젊은 세대의 생활을 안정시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의도는 있지만 환경 탓에 뜻을 이룰 수 없는 경우를 줄이는 방향이다. 반면 가정을 이루지 않는 것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비난하고, 죄악시하고, 여론의 심판에 올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다르다. 그러한 관점은 개인을 어디까지나 사회의 부품으로 보는 것과 다름없다. 타인의자유를 해치지 않는 개인의 선택, 그것도 그들의 삶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선택에 대해, ‘삼포세대라고 동정하든 독신, 무자녀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든, 지나치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큰 실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연애의 온도 – 일상과 환상과 진상 사이 문화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결과에 대해 우리는 늘 원인을찾는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어떤 일을 계기로 시작해, 어떤 일을 계기로 틀어지고, 다시 어떤 일을 계기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것이 인과의 법칙을 신앙으로 삼는 우리들의 (연애) 문법이다. 그리고 영화를 비롯한 픽션에는, 특히나 그러한 문법을 요구한다. 우리는 현실과 똑같은 것보다, 그러한 믿음에, 즉 특별한 계기로 꽃피고 특별한 계기로 꺾인다는믿음에 충실하게 구현된 사랑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 사랑을 봄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고재확인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뭔가 대단한 사건을 가리켜 극적이다(dramatic)’라고 하는 까닭도, ‘이란 그러한 사건이 없으면 존립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연애의 온도>는그러한 사건성의 서사, 계기를 가지고 이어진 사랑 이야기에 벗어난 영화다. 주인공들이 무슨 계기로 싸우고 헤어졌는지언급이 없다. 또 다시 마음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계기도 없다. 다만회복된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만 주어진다. 어쩌다 보니 서로 상처를 주고받아서 헤어졌고, 어쩌다 보니 다시 통해서 결합했다. 그리고 다시 비슷하게 반복된다. 이런 점은 작년 이맘때의 <건축학 개론>과 비교하면(물론 다른 무수한 로맨스 영화를 통해서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들의 첫사랑이 깨진 이유는 너무나 극적이고분명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우리의 연애 문법은, 이런 이유로<연애의 온도>에서 혼란에 빠진다. 영화가 현실적이라는 공감대가 발생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를움직이는 것이 커다란 사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도 모르게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만고불변의진리가 틀렸다는 말일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영화 속 동희와 영의 연애는 데우스엑스 키나가 해결했어야 했다. 원인은있었다. 다만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그 원인이너무 길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일 테다. ‘일상이란 이름의원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그랬고 그래왔던변하지 않는 것들이다. 

일상이란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축의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그것들은 영화에서 헤어짐 또는 재결합에 대한 원인이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는 시간적으로그것은 이 아니라 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한두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그래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판단의 차원이다. 아무리 매일같이 벌이는 행동이라도 그것이 판단하는 주체에게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일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조건에서 볼 때 일상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일상이 상대적이라는 이야기는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이 얼마든지비일상적으로 변주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변주의 방향은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도 가능하다.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조건을 충족하는 일상적인 것, 즉 늘 같은 사람, 같은 행동을 가지고, 우리는 그것이 뭔가 특별한 것이기도 한 양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너무나 미워하기도 한다. 이점에서 일상은 곧 우리를 사랑에 빠뜨리는 환상이 될 수도, 상대에 대한 정나미를 떨어뜨리는 진상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이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단 하나, 판단의 주체인 우리다. 늘똑같은 것을 보고도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 따라 사랑스러워 하기도, 기분 나빠하기도 한다.

<연애의 온도> 주인공커플의 경우에도 그들의 성격, 문제점, 버릇,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사람이 아니라, 정말 별것도 아닌 일에 흔들리는 때때의 감정이다. 그렇지만우리는 이 사실, 우리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때때로 망각하고,연애에 있어서 극적인, 결정적인 계기를 꿈꾸곤 한다. ‘다음엔안 그러겠지상대에게 기대하고, ‘또 그러지 말아야지하고 자신을 억누른다. 그렇지만 현실은 대개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가지 않는다. 감정에 따라 비슷한 일로 또 싸우고, 시간이조금 흐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지후회한다.

그 순환의 굴레 속에서 누군가의 사랑이 아예 식어버리든가(그 결과로서바람을 피든 이별을 통보하든 하게 될 테다), 혹은 사랑이 남아 있어도 그 굴레 자체가 싫어서 견디지못하고 선을 넘을 때가 헤어짐의 순간이다. 물론 후자의 경우, 사랑이남아 있는 경우에는, 감정이 변하면서 다시 그 굴레로 찾아 들어갈 수도 있다. 영화에서 82%가 재결합을 하지만3%만이 성공(이 성공이 단순히 결혼만을 이야기하는 것일지는 의문이다만)한다고 말하는데, 이때의 3%란그 순환의 굴레에서 탈출한 사람이 아니라, 고생 끝에 굴레에 적응한 생존자들을 뜻할 것이다. 또 이때의 적응이란 것은 사람이 변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대하는상대방의 포용력, 이해력이 시간에 걸쳐 변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우린보통 성장이나 성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순환의 굴레란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누구도 아닌자신이, 자신의 감정이 만든 것이다. 이점에서 연애의 온도를 결정하는 것은 측정되는 대상, 연애 상대가 아니라, 온도계 자신이다. 다만 온도계는 온도계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최대한 인정하고 싶지 않다. 손해보기싫어하는 알량한 자존심, 사소한 것에 토라지는 소심함, 버림받을까전전긍긍하는 두려움, 요컨대 자신의 찌질함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도계는 상대에게 책임을전가한다. ‘너 때문에’, ‘네가 그래서’, ‘너만 아니었으면등등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재미있는 점은 상대도 똑같이 자기자신의 온도를 측정하는 온도계라는 사실이다.이 때문에 두 개의 온도계는 서로의 온도를 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이 재고 있는 것은본인의 온도다.

<연애의 온도>는이러한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자꾸만 우리가 잊으려고 하는 사실을 찔러준다. 우리는 참 약하다. 그리고 그 약함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는, 가장 간절하게 생각하는 대상과의 관계, 연애에서다. 연애에서 사람의 밑바닥을 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입에올리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소한 일로 싸우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일을 계기로 마음을 푼다. , 그런 것들은 결국 평소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우리 마음 속의 약함, 부끄러워서 드러내기 싫어하는 감정에 의해, 막상 자신도 모르게 큰 문제가 되고 대단한 결과를 낳는다. 그 감정들이, 일상의것들을 아름다운 환상으로도 꼴보기 싫은 진상으로도 만들어 버린다. 이점에서 볼 때, <연애의 온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씩은 갖게 되는추억이자, 이불 위에 누워 하이킥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던 그러나동시에 아름다웠던 감정에 관한 영화다. 어쩌면 영화 초중반을 수놓는 주인공들의 과격한 진상짓이야 말로, 다소 과장되었을지언정 연애의 본질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김미경의 막말, 죽은 돼지고기의 인문학 잡담

요 며칠 사이에 벌어진 김미경의 몰락(?)이 흥미진진하다. TV쇼에 본인 이름을 내걸고, ‘무릎팍 도사’에까지 출연하며 순식간에 전국구급 스타로 올라선 김미경이 인기를 끌었던 비결로는,김난도나 혜민스님 류의 온건한 힐링, 멘토링과는 다른 화끈함, 거침없음이라고 이야기 된다. ‘독설 멘토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비방에 가까운 표현도 서슴지 않으며, ‘이기고버티고 성공해라는 메시지도 노골적이다. 그리고 그 거침없음이화를 불렀다. 

관심을 끄는 건, 논문표절에 앞서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된 막말이다. 그 내용은이렇다. "인문학은 지혜를 만들기 위해 읽는 것이고, 그사람의 지혜가 300페이지 서적으로 쓰이면 그게 자기계발을 해온 거고 그게 자기계발 서적이다. 근데 안 읽는다고? 웃기고 있어.시건방 떨고…" 이 말이 인문학 비하 발언으로 퍼지면서 김미경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다. ‘시건방이라는 표현이야 그 사람의 언어 습관이 평소에도 다소 거친편이었다니 하니,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런데짚고 넘어 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그보다 앞, ‘인문학은 지혜를 만들기 위해 읽는 것이라는 말이다. 

틀린 소리는 아니다. 인문학은 물론 지혜를 만든다. 그리고 (특히 스티브 잡스 이후 최근에는 더욱) 많은 자기계발 담론이 인문학에서그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추출하고 있는 것도 맞다. 즉 인문학은 자기계발을 위한 지식과 요령을 스스로담고 있다. 특히 동양고전이나 위대한 인문을 일대기를 다룬 전기, 역사서가유용하게 쓰이곤 한다. 마찬가지로 지난 한두 해 특히 인기를 끈 힐링적 요소를, 인문학 안에서, 특히종교적이거나 인간의 내면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 안에서 찾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종교인 또는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힐링 전도사로 각광받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요컨대 자기계발 전도사들과 멘토’, ‘힐러들이 인문학의내용을, 자신을 위해 이기적, 합리적(전혀 어감은 다르지만 영적으로라는말도 이럴 때 비슷하게 사용된다)으로 이용하도록 권할 수 있는 바탕은 인문학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김미경이 인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인문학은 지혜의 책, 자기계발서는 그것을 요약한 것) 나아가 최근 유행하는 인문학을 이용, 활용하자는 담론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인문학이 이러한 요소들, 자기계발이나 힐링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것들이 인문학의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힐링이든 독설이든 자기계발서에는, 인문학의 중요한 요소 어쩌면 가장본질적인 요소를 없는 것 치부된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humanities)을뜻하는데 이 때의 인간은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으로서의, 복수의 인간 또한 뜻한다는 사실이다. 즉 인문학은 개인의 문제를다루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조직, 사회, 문화 등등 여럿으로서의 인간의문제를 관통하는 학문이다. 

최근 마구잡이로 출판되는 인문학 교양서를 보면, 대다수가 길이가 짧고간략한 내용의 동양고전, 흥미로운 서사가 있어 읽기 편한 신화, 한두마디 문장으로 요약된 아포리즘’(이른바 명언) 등이 주로 다뤄진다. 원전의 분량이 방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쉽고 친절하게라는 이름으로 흐름과 맥락은 싹둑 잘린 채 줄거리만 요약되기도 한다. 사상가가품은 사유의 전체적 흐름이나, 시대적 배경, 책 전체의 맥락보다는, 그 속의 일부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기기 쉬운 내용으로 책을 채우기 위함이다.이를 통해 자기계발의 방식이든 힐링의 방식이든 독자는 자극되나, 정작 고전을 지은 저자가살았던 사회의 맥락과 비판의식은 사라진다. 심지어 니체 등이 자기계발의 원리로 동원되는 어이없는 일이일어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작금의 인문학 소비는 이렇게 인문학의 일부, 그것도 용도에 맞게 개조된일부가 마치 그것의 전부인양 곡해되어 이루어 진다. 그리고 인문학이,본래 원전을 지었던 저자들이 품고 있던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사회비판적 요소는 거의 언급되지않는다. 즉 인문학에는 너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라는 이야기도 있다는 사실이 가려진다. 예를 들어, 많은 동양고전은 춘추전국시대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미쳐, 난세에 처한중국 대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쓰여졌으나, 대다수 자기계발서에는 처세술의 일환이나 내면 수행의 문제로다뤄진다. 이러한 본래의 맥락에서라면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는 사회를 바꾸라는더 중요한 이야기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지만, 처세술과 자기계발의 맥락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쏙 빠지고성공하기 위한 방법론이 될 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인문학이 가진 사회성은 다른 학문, 특히 사회과학과 비교해 보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사회과학은 그 연구대상의 외연이 인문학에 종속되며, 그 방법론으로는 자연과학에종속된다. 인문학과 똑같이 인간을 특히 여럿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만, 연구를 할 때 보다 경험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보다 가치중립적으로 되려고 노력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그 가치중립이란 것도 사회과학이 현실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키고자 하는 목적성을 완전히 버린다는, 불가능한 가정을 취하지 않는 한 항상한계에 부딪힌다. 때문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로, 전통에 따라서(특히 유럽권에서는)사회과학은 인문학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애당초 자기계발서들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사회과학의 일부이나 자체로 너무 커진) 경영학 특히 인적자원 관리분야에서, 인문학을끌어 쓸 수 있는 근거는, 둘 모두 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은가? 

설령 사회과학을 인문학과 엄격히 구분된 다른 학문으로 여긴다 해도, 인문학과사회과학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란것이 있으므로(사실 이것이 인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중심과제다) 자연물과 똑같이 다룰 경우, 완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은 인문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이없는 사회과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란 게 없고 우리는 일종의기계라는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극단적인 진화심리학, 사회생물학 추종자와 같은 순수한 유물론자일것이다.

그런데 사회과학이 인문학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인문학또한 사회적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된다. 또 인문학은 그 성질상 사회과학보다 훨씬 가치지향적이므로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야 한다.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을 사회적 문제의식 없이 소비하는 것은 인문학을 반쪽만 아니 그 이하로 잘못 왜곡해 소모하는 행위다. 역사 속의 어떤 현인도 너 자신만의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사람이 현인을 자처한다면, 또는 현인의 말을 그런 식으로 남용한다면, 그는 사후세계나 초현실적환상을 미끼로 대중을 미혹했던 고대의 거짓예언자들이나 다를 바 없다. 다만 현대에는, 대중에게 보장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공 스토리, 마음먹기에따라 언젠가 얻어진다는 환상세계로 바뀌었을 뿐이다.

김미경은 인문학의 지혜가 300페이지로쓰이면 그게 자기계발서라고 했는데,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300페이지로 함축된 것은, 인문학의 지혜가 아니라 인문학의 일부일따름이다. 그 일부만 편리한 만큼 가져다가 그게 지혜의 보고인양 하는 것은, 마치 고기로 쓰기 위해 돼지의 일부 부위를 떼어다 놓고는 살아있는 생물 취급하는 격이다. 이 점에서, 김미경의 인문학비하의 본질은, ‘시건방운운하는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에서 사회문제를 거세하고 편할 대로 자기계발과 처세의 논리로 동원하는 그 폭력성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 비하행위는, 인문학을 스펙의 하나로, 건강 음료처럼 소비할 것을 종용하는 다른모든 인문학 장사치들에게도 해당된다. 사회비판 없는 인문학은 이미 인문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성(=humanities)의일부만을 잘라놓은 것은 이미 유기체가 아닌 고깃덩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이걸 인문사회 밸리에 올려야 하나 뉴스비평에 올려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래도 뉴스로 인해 쓰게 된 글이니 뉴스비평으로 보냅니다.





작은 제국주의, 시군 통합에 대한 단상 잡담

땅에도, 지역에도 귀천이 있다. 해묵은 지역 갈등을 조장하는 말이 아니다. ‘롯데 캐슬이었는지타워팰리스였는지 당신이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10여년 전 광고카피는 그저 특정 아파트만을 강조했다기엔 이 사회를 너무 깊게 꿰뚫고 있는 문구였다. 좁게는 어느 아파트, 어느 동네인지에서 어느 구, 강 윗쪽아랫쪽인지까지, 같은 서울에 살더라도 어느 땅에 사는지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결정된다. 신토불이(身土不二)의 절묘한 재해석이라고나 할까.

여기까지는 서울에 산다면 누구나 느끼는 현실이다(그렇지 않더라도 언론에서끊임없이 재생산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런데 지방사람들에겐 서울 사람들이 가로세로 30x30km도 되지 않는 좁은 땅덩이를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양 부촌이니 달동네니 갈라놓는 게 황당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서울, 수도권 밖의 그 넓은 지역을 지방, ‘시골이라는 이름으로통칭하며 하위외부 세계로 간주한다. 부산에서 올라가도 상경이고, 철원에서 내려가도 상경이라니.

안타깝게도 편견의 액자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구의 90%이상인 지역사람들에게 은 마치 서울이 지방에게 대하듯 하위의 외부세계다. 지방자치법에는 분명히 시ㆍ읍 등의 설치기준이란 조항이 있지만, 높고 낮음을 뜻하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승격으로부른다. 시가 되는 것이 승격이라면, 군으로 머물러 있는지역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야만-문명의 제국주의적이분법이 여기서도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군 지역에서 산다는 것, 쇼핑을하거나 영화를 보려고 30분씩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는 게 불쌍한 일이라면 시 지역에 산다는 것, 함부로 집 문을 열어 두지도 못하고 3-4평 남짓한 주차공간에 자동차를끼워둬야만 하는 것도 불쌍한 일이다.

그래도 산업화 시기에는 전국의 많은 군 지역이 승격의 은총을 입었지만, 이제는 경기도의 일부를 제외하곤 인구 감소로 통폐합이나걱정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일까 시군 통합을 하려는 지역이 많다.인구증가로 못 이룰 승격의 꿈이라면, 아예 도시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이미 청주시와 청원군은 통합이 확정되었고, 내가 오랫동안 살았던지역도 인근 시와 통합 찬반투표를 곧 앞두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찬성과 반대 플래카드가읍내를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가 되면 뭐가좋은지 나쁜지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시가 되면 자연스레 주위 논밭이 아파트 단지로 바뀔거라는 환상만 굳건하다. 차라리 군민보다는 시민이란 이름이더 멋있게 들린다는 동생이 말이 지금까지 얻은 것 중 가장 그럴 듯한 찬성의 이유다. 물론 좋은 점은있을 것이다. 대중교통도 일원화되고, 학군도 통합되며 행정이나복지 면에서 효율성이 높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동생이 말한 대로 브랜드 가치도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반대로 통합이 되면 도심지역으로 인구가 흡수될 것이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며, 농촌 지역의 이해를직접 대변해 줄 군수도, 군 의회도 사라진다. 통합된 시의시장이 옛 군 지역에 혐오시설 유치를 인구수의 논리로 밀어붙인다면? 행정구역은 승격될지 모르나, 군민의 삶의 질까지 승격된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의대다수는 공무원 자리 감축 등 자신의 이권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만, 그런 그들의 이기적 행동이 보기좋지 않다고 해서 통합의 정당성이 자동적으로 부여되지는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 어차피 조선이 자력으로 근대국가가 되지 못한다면아예 뼛속까지 일본이 되자는 친일파들의 내선일체론도 당시의 시각으로는 일리가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테다. 한반도를 비롯해 50-6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의 대부분은 탈식민지화됐지만, 제국에 대한 식민지적 정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하다. 그제국이 꼭 강력한 근대국가인 건 아니다. 소박한 농촌 군민들에게 도시는 제국이요 동경의 대상이다. 아니 시민(민주주의혁명의 주체들은 도시에 살았기었기 때문에, 대표 이름도 그들이 차지했다)’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미디어에서 그런 생각을 조장한다. 동양을 신비하면서도 전근대적인 세계라고 멋대로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은,전원생활은 아름답지만 시골생활의 불편할 거라는 이중성으로 똑같이 작동한다. 내가 살아본경험에서 말해보자면, 크게 아름답지도 크게 불편하지도 않다. 시도군도 사람 사는 곳이다. 땅에 귀천이 대체 어딨나.


창조경제, 북한산엔 북한이 없고 붕어빵엔 붕어가 없다. 잡담

고생 끝에 내각이 구성되고 정부가 슬슬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5년전쯤엔 녹색이란 말이 붙은 용어가 쏟아져 나왔다면, 이번 박근혜 정부의 경우엔 역시 창조경제일 텐데 이 단어를 둘러싼 논란과 소동이 아주 가관이다. ‘Q’가곧 국내 개봉할 예정이라 그런지 한창때 에반게리온 해석 논쟁을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포탈 뉴스에 창조경제를검색만 해도 이미 수백 개의 관련 기사와, 수십 가지의 해석을 찾을 수 있다. ICT, 인재중심, 중소기업 이런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지만, 그 외에도 이스라엘, 에너지효율화, 디자인, 문화 콘텐츠, 랜드마크 건설, 짜파구리 치맥등등 별의별 해석이 다 있다. 심지어 올 초엔 배임죄성립기준 완화해야 창조경제가 된다는 말도 있었다. 배임죄 기준이 완화되면, 경영상 보폭이 더 자유로워지므로 기업가정신을 발휘해 창조적인 활동을 하기 쉽다나? 아무튼 대부분의 기업과 이익단체는 이 단어를 마음껏 편리하게쓰고 있다. 내용물이 비어 있어, 그저 자신들이 해왔던 것,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채워 넣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말을 던진 사람이 설명을 안해줬기 때문이다. 에반게리온이야 안노 히데아키가 워낙 기인(奇人)이도 하고 제작자가 작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대통령인데, 왜 구체적이지 못하냐고 따져 묻기에 앞서걸리는 게 있다. 한 걸음 더 깊은 곳에 있는 의문, 애당초이 말은 과연 해석될 수 있는 말인가하는 문제다. 만약 해석이 안 되는 말이라면, 그 말을 던진 사람의 잘못으로 보지않을 도리가 없다.

창조란 말 때문에 초반에, 창조론이니 창조과학이니 하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의미를 빼고 이 말을 사전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 ‘새로운 성과나 업적, 가치 따위를 이룩함대충 이 언저리 사이에서 의미가 해석될 것이다. 더 간단한 말로 하자면, ‘새로운 것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새로움이란 기본적으로 의미가 비어있는 상대어. 기존의 것과다른 것이라면 뭐든 새롭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아전인수 해석의 근거는 이미 단어자체에 내재되어 있는셈이다.

말의 원조인 존 호킨스의 저서 등에 내용이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하지만 창조경제 본래의 맥락은, 제조업은 장기불황에 빠졌고, IT산업의 버블이 꺼진 세기전환기의 영국에서, 본래 강점이었던 문화콘텐츠 산업에 주목하고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넓은 의미로 "창의력으로 제조업, 서비스업 및 유통업, 엔터테인먼트산업 등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뜻하는데, 문화산업은(작가 소수에 의해) 가장 창의력이 발휘되기 쉽고, 창의력에의존하므로 이 방향에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그가 정리한 창조산업 목록에는 기술분야가 1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국은 영국과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정부는 창조경제의넓은 의미만 취하고 구체안은 우리의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바 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확장이 가능하다면, 생리적인 것을 제외한 인간의거의 모든 활동에 해당될 수 있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능력(줄인다면창의력, 창조력이 되겠다)이 필요 없는 분야, 도움이 되지 않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호킨스의 넓은 의미의 창조경제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 맥락을 생략할경우 만능 열쇠, 마법의 단어가 되고 만다. 아니 오히려, 무엇무엇이 창조경제에요, 하고 지정해버리는 순간 오히려 단어 본래의의미인 창조가 막혀버리는 모순에 처한다. 창조 경제의 창조,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나 방법을 뜻하지, ‘만들어진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가 창조경제를 이야기할 때, 모든 분야, 산업, 단체, 기업은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 자신들의 목적이야 말로 가장 창조적인 일이라고 강조하게 된다. 사실 모두 어느 정도 옳은 말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활동은 창조적이니까. 처음에 언급한 온갖 갖다붙이기, 개드립이가능한 이유다. 심지어 230년전까지 거슬러올라가 창조경제를 찾는사람까지 있지만 맥락이 없이 던져진 단어를 어떻게 쓰든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창조경제 진흥을 위해, 자신들이 창조적이라고 주장하는모든 주체들에게 (재정적인 것은 물론 제도적인 것까지 포함하는) 지원을해야 할까? 논리상으로는 그래야 한다. 농업도, 제조업도, 서비스업도, IT, 금융업도, 다 창조적이고, 창조적인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정부의 전방위적 지원, 다른 말로하자면 지출확대다. 그런데 이 지출, 지원이 어디로 누구에게어떻게 갈지는 아직 모른다. 지금 온갖 기업과 이익단체 등이 단어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목소리를높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점에서 작금의 창조경제 논란은 이른바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콩고물 싸움의예가 되어가고 있다.

창조경제의 원조가 스마트’뉴딜’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때에 IT라고 분명히 명시되었던 개념이 창조라는 한층높은 단계로 추상화되면서, 논쟁의 여지를 만든 것이다. 스마트뉴딜도 결국은 IT쪽에 돈을 풀겠다는 말이었는데, 거기서 IT로 명시된 부분만 사라졌으니 돈을 풀겠다는 말만 남았다. 이 경우창조경제에는 경기부양을 제외하고는 무엇이 남는 것인지 의문이다. 오히려 일본은행 윤전기를 마구 돌리겠다는아베노믹스가 더 솔직하게 들린다. 창조경제 앞에 일자리를창출하는이라는 말이 붙은 것도, 돈을 풀면 고용이 늘지않겠느냐는 기본적 상식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창조 경제는 창조를 운운하지만 정작 이 정책 자체는 너무 창조적이지 못하다. 선사시대부터있었던, 인간이 동물과 달리 문명을 꾸리며 살아올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비결을, 새로운 것인 양 가져온 꼴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낡았다고 여기고, 창조적인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여기는 농업이나 굴뚝 산업이야 말로, 당시에는인류의 운명을 바꾼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변화였다. 즉 정부와 관련 어용학자들은 창조력이 새로운 산업의 에너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것은 그보다높은 차원에 있는 것, 산업을 가능케 만드는 메타 산업적인 개념이다. 요컨대 이런 말은 정부 정책보다는 고등학교 교훈 정도에어울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스타크래프트2 군단의 심장 - '여왕비어천가'로 퇴보한 블리자드표 게임 내러티브 문화


컴퓨터 게임에서 내러티브가 가지는 위상은 참으로 미묘하다. 비주얼(또는 사운드) 노벨이나어드벤처처럼 내러티브가 없으면 성립이 안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전략시뮬레이션이나 스포츠 게임처럼그 역할이 극도로 보조적인 것에 그치는 것도 있다. 심지어 최근 대세인 모바일 또는 페이스북 기반의 SNG는 대다수가 아예 내러티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임이라는한 이름 아래서 내러티브는 이처럼 다양한 비중으로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인 경향은 있다. 실시간일수록, 액션성이 강할수록,규칙이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요컨대 게이머에게 높은 집중도를 요하는 게임에서 내러티브가갖는 위상은 낮아지고, 그 반대일수록 내러티브는 중요해진다.

 

블리자드의 전통, 내러티브 중시

전통적으로 블리자드는 전자에 속하는, 즉 내러티브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장르를 주로 개발해 왔다. 3대프랜차이즈 중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는 본래 실시간전략(이하RTS), 디아블로는 액션RPG. 장르의 측면에서보자면 어느 쪽이든, ‘PC방에서 즐기기 좋은그러니까긴 흐름의 내러티브에 의존하지 않는 게임이다. 그나마 게임을 하면서 끊임없이 내러티브에 일부 접촉하지않을 수 없는 디아블로 시리즈 조차, 퀘스트, 지도, 보스 몬스터 단위로 끊어서 즐기는데 최적화되어 있기에 등장인물은 자주 부각될지언정 내러티브에 대한 의존도는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는 다른 어떤 제작사보다 게임의 내러티브에 정성을 기울여 온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 이후에 더욱 강해졌는데, 이는 <WOW>의 초월적인 성공으로 윤택하다 못해 풍성해진자금사정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디아블로3> 발매 이후 사정이 조금 변했다지만) 블리자드가 장인 장신을 갖췄다는 칭송을 들으며 많은 고정 팬층을 확보했던 비결에는, 어찌보면 팬 서비스에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수지가 맞지 않을 법한 노력과 비용을 게임 내러티브에 쏟았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스타크래프트2 군단의 심장>(이하 <군단의 심장>)은 이 점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내러티브수준을 보여주는 게임이다. 사실 내러티브의 약화는 전작 <스타크래프트2 - 자유의 날개>(이하<자유의 날개>) 캠페인이 오직 테란 시점에서 진행될 것이란 발표가 나왔을 때부터우려되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1> <워크래프트3>에서 보여주었던 캠페인 구성, 시간차를 두고 여러 진영이 교대로 주인공이 되는 캠페인 구성의 이점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RTS에서의 내러티브 제약과 극복

RTS게임의 싱글 캠페인은 기본적으로 개별 임무를 하나하나 클리어 하는 과정을 누적해 완성된다. 이를 수식으로 쓰자면 ‘C=M1+M2+M3+…+Mn’(C는캠페인 전체, M은 개별 임무) 정도가 된다. 그런데 개별 임무는 어떻게든 적을 물리치고(또는 적으로부터 버티고)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무 사이에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을 넣지 않고 그냥 더해버리면, 캠페인은 아무런 기승전결이없는 단선적 상승기, 성장기가 되어버린다.

<스타크래프트1> <워크래프트3>의 캠페인 구성은 이런 단점을 효과적으로상쇄한 바 있다. 즉 개개 진영의 캠페인이 다소 일방적이고 단조로울지라도, 길지 않은 그 진영이 캠페인이 끝나자 마자 바로 갈등상황에 있는 다른 진영의 캠페인을 진행해 내러티브의 반전을자연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 <워크래프트3 프로즌쓰론>에서는 한 진영의 캠페인 내에서 시점 전환을(언데드 캠페인 중, 실바나스 윈드러너 임무) 시도해 갈등 상황을 부각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구조 속에서, 게이머가 그저 일방적으로 이기고 또 이긴다 해도, 전체 캠페인에서는승리와 패배, 상승과 하강이 오가는 긴장감 있는 내러티브가 완성된다.

<자유의 날개>는 이러한 캠페인 구조를버렸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성공적인 캠페인 내러티브를 보여준 바 있다. 제작진도 패키지별로 종족을 구분할 때 발생하는 캠페인의 문제를 인지했던 것인지, <자유의 날개>의 내러티브가 일방적이고 단순하게 보이지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에서 언급한 임무 사이의 특별한사건이나 반전이 아주 풍성해진 것이다. 특히 등장인물이대폭 늘면서 진영간 갈등이 단순해질 수 있다는 문제를 인물간 갈등으로 충실히 보충했다. <자유의날개>에서 임무와 임무 사이를 채우는 주인공의 함선 히페리온은 그야말로 (진영간의 갈등에 비하면 작을지라도) 인물들 사이의, 또는 (특히주인공 레이너) 인물 내부의 갈등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공간이다. 특히타이커스나 토시 같은 인물은 친구와 적의 경계를 넘기도 하며 캠페인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거기에 기술력과자본력으로 무장한 많은 시네마틱[1] 또한거대한 스케일의 특별한 사건이나 반전을 임무 사이사이에제공해 내러티브를 강화하는 무기다. <자유의 날개> 메인 내러티브와는 관계가 적으나, <스타크래프트2> 3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복선으로서 보너스에 가깝게 주어진 예언 임무도 캠페인이 단순해지는 것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 주인공 진영인레이너 특공대는 분명히 승승장구하는데도, 뭔가 마음먹은 대로만 되지 않고 문제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는느낌은 이런 식으로 주어진다.

 

존재감 떨어지는 등장인물들

<군단의 심장> 캠페인은 앞에서 언급한두 가지 캠페인 방식, <스타크래프트1><워크래프트3> 또는 <자유의 날개>중 어느 쪽의 장점도 취하지 못했다. 진영별 패키지가<스타크래프트2> 3부작의 포기할 수 없는 방침이라면, 최소한 <자유의 날개>와같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일단 무엇보다 <자유의 날개>에 비해 주인공 케리건 한 명의 비중이 압도적으로높다는 점에서 문제를 안고 시작했다. 물론 작품의 기획 자체가 케리건의 이야기라지만, 그러다보니 케리건 이외의 모든 저그 등장인물들은 내러티브에 보조적인 수준 아니 없어도 되는 수준으로 격하되어버렸다. 이즈샤, 자가라,아바투르, 스투코프, 데하카 중에서 <군단의 심장>의 주요 갈등대상인 멩스크와 접점이 있는인물은 아무도 없다. 인간이었던 스투코프 정도만이 약간의 감정을 드러낼 뿐이다. 케리건의 (멩스크와는 다른 의미에서) 또 다른 관심대상인 레이너와의 접점도 마찬가지로 없다. 이는 <자유의 날개>에서 레이너 이외의 등장인물들이 내러티브에서가졌던 위상과 비교하면 천지양차다. 레이너와 함께하는 거의 전원이 나름대로 멩스크와 적대할만한 자신만의충분한 이유를 가졌고, 케리건과 관련해서는 주인공 레이너와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그와 비교해, <군단의 심장>에서 케리건 진영의 인물들 사이에 갈등이드러나는 경우는 캠페인 초반의 자가라 단 한 번이며, 그것도 케리건에게 복속되기 전의 일이다. 그 뒤로는 여왕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자가라와데하카의 말싸움과 같이 인물간의 갈등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캠페인 내러티브 전체적인 틀과 무관한해프닝 정도다. <자유의 날개> 캠페인 내러티브의 완성도를 높인, 같은 진영 내 등장인물들사이의 갈등은 <군단의 심장>에서 거의 찾아 볼수 없다. ‘히페리온이 갈등의 공간이었다면, ‘거대괴수는 복종의 공간인 것이다. 복종이 비록 저그 종족의 특징이라지만, 복종만으로 채워진 인물들은극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캠페인 상 케리건의 절대적인 비중과 저그종족의 특징이 결합되어 나타난 이런 문제는 물론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블리자드가 명성처럼그리고 지금까지의 역사처럼 게임 내러티브에 대한 장인 정신이있다면, 이대로는 아니었다. 군단의 심장에서는 이미 저그진영 인물들에도 인간성비슷한 무언가, 감정과 다양성을 있음을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거기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 그들과의 또는 그들끼리의 갈등을 보여주지 않는가? 자가라와 데하카의 내전이라든지, 멩스크의 군체모방기에 포획되어 배신하는 저그 등도 얼마든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아이 하나 키우는 <프린세스 메이커>에서도 숱한 위기와 좌절을 겪는데, 수십억 저그를 키우는 과정이이렇게 수월하다니 맥이 빠진다.

 

승천과 추락

게다가 주변인물들의 비중이 떨어졌다고해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훨씬 정교해진 것도 아니다. 주인공케리건의 고뇌와 내적 갈등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은 딱 두번, 캠페인초반 저그로 돌아가기 직전과 구출한레이너에게 차가운 반응을 받을 때뿐이다. 하지만 금세 다시 복수라는 본업으로 돌아가는 케리건의 모습을보자면 강인한 정신력 소유자인 것인지, 단순히 인간성이 첨가된 복수의 화신인 것인지 헷갈리기 까지 한다. 짐 레이너의 4년 폐인생활로 시작하고, 그의 처절한 선택으로 끝나는 <자유의 날개>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RTS 게임 캠페인의 특성으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내외적 갈등이 부족한 구조 속에서, 케리건의 저그 진영이 일방적으로 마치 눈덩이 굴러가듯 성장, 상승하는 단순한 내러티브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캠페인 도중 케리건과그녀의 저그가 과연 위기다운 위기에 처해본 적이나 있었는지 의문이다. 언급할만한 절체절명의 위기라고는엔딩 바로 직전, 멩스크의 유물 함정에 걸린 게 전부다(그마저도 순식간에 해소 된다). 제루스행성에서 고대의 존재가 배신할 때에도 케리건은 여유를잃지 않았다. 케리건과 저그가 마음 먹은대로 거의 일직선으로 성장하는 게 <군단의 심장> 캠페인이며, 그 과정에서 후퇴와 긴장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군단의 심장>의 엔딩 시네마틱 제목은승천(Ascension)’이다. ‘Ascension’라는 단어는 왕의 즉위를 뜻하기도 하지만, 예수가 부활한 뒤, 얼마간 제자들과 함께 하다가 하늘로 올라간 사건 또한 의미한다. 한국어판번역도 그렇고 엔딩 시네마틱에서 케리건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을 볼 때,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할 것이다. 여기에는 케리건이 일종의 인간 이상의 초인이라는 함의도 보인다. 동양권에서도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위대한인물을 칭송하는 데 쓰이는 흔한 비유다. 요컨대 이점에서 볼 때,<군단의 심장> 캠페인의 일방적으로 성장, 상승하는구도는 내러티브의 단순함을 낳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위인전적인 내러티브가 낳은 결과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영화<링컨>이 위인전의 링컨을 넘어서 그의 한계, 모자람, 갈등 등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면, <군단의 심장>은 그러한 모자란 면’, ‘문제점을 보여주지 못한 나머지, 상승 구도과 내러티브가 상호 역작용해위인전처럼 설득력 부족한 이야기로 추락한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거대괴수에 맨손으로 들어온 뒤 성장해, 복수에 성공하고 군단의 심장이된 케리건의 이야기. 하지만 그 성공기는 너무 단순해진 나머지, 그저여왕님의 위대한 업적 기록 이외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3부작의 허리부분 1/3, 마지막 3 <공허의 유산>에서 저그가 활약할 수 있는 근거와 테란에일어난 변화 정도를 설명하는 과정 정도로 소모되어 버린 것이다. 이 과정을 이렇게 단순하게 꾸밀 것이었다면, 차라리 공식 소설 정도로 나오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미 다른 작품들에서 블리자드의 내러티브능력은 충분히 인정받은 바 있다. (<디아블로3>처럼) 이번 작품에도 촉박한 발매 스케줄 등의 문제가 있었다면, 몇 번씩발매 연기를 해서도 원하는 만큼의 성과물을 내놓았던 예전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이미 몇 번씩이나 보여줬던것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다.



[1] 게임의 처음이나 끝 또는 도중에 삽입되는 영화와 같은 영상.



본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단순히 <군단의 심장전체를 비방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을지 몰라서 적습니다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오직 게임 내 캠페인의 문제로내러티브가 기존의 블리자드 작품과 비교해 매우 아쉬웠다는 점입니다멀티 플레이 등 다른 중요한 요소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요.






안철수, 변비환자의 악순환 잡담

출처 - 구글 이미지


 미국에는 초콜릿맛 변비약(Cholated Laxative)’이 판매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변비를 고치기 위해 변비를유발하는 그 설탕덩어리 물질을 더 많이 먹으라는 얘기다. 물론 금연초기에 보조약물 도움받듯 몇 번은 편하게 먹어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씩, 아니 1년도 넘게 이런 물건에 의존하고 있다가는 어떻게 될까. 아마 그때쯤에는 상태가 중증일테다. 초콜릿 없이는 화장실도 못가는 지경이 될지 모른다. 

 안철수의 언행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초콜릿 약에 중독된 변비환자가 떠오른다. 애당초 안철수 현상을 일으키며 그를 유력정치인으로만든 가장 큰 요인은 기존의 정치권과 거의 접점이 없다는 비정치성이었다. 정치권을 싸잡아 비판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손상이 없는, 초콜릿처럼달콤한 자리다. 정치인이 아닌 사회적 명망가라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입장이지만, 문제는 그가 정치인으로 여겨진 재작년 9월 이후에도, 심지어 스스로 자신이 정치인임을만방에 선포한 후에도 이런 비정치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이라는것은 어떤 목표나 생각이 다른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갈등과정에서 승리 또는 패배하거나 누군가가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되면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안철수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중심철학(그걸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매우 비정치적인것들, ‘상식, 타협, 국민을위한 정치등이다. 요즘에는 '새정치'를 특히 주로 미는 것 같은데, 이도 마찬가지다. 정치란게 존재하는 이유는 서로 동의할 수 없는 의견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싸울 수 밖에 없는 걸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안철수가 말하는 것들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나? 상식은 '대다수가 합의'했다는 뜻을 내포되어 있기에, 논쟁의 여지가 당연히 없다. 새정치? 이게 무얼 뜻하는지 이야기가 분분한데, 송호창은 '책임정치'라고 하고, 안철수는 '정치의 기본으로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어느쪽이 됐든, 지당한 말씀이고 아무도 거기에 반대할 사람 없다. 이런 것은 정치가 아니라, (법적인 시비를 가린다는 좁은 의미는 물론 도덕과 여론으로 심판받는다는 넓은 의미까지 포함하는) 사정(司正)의 문제다. 

 물론 기존의 정치권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정치외적인 인물, 수사 등에 끌리는 것은 있을 수 있는 현상이고, 그것이안철수를 유력 정치인으로 만든 동력이었다. 하지만 일단 정치인이 된 순간부터 아니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먹었을 때부터, 상식 등 비정치적인 가치는 기본 요소 내지는 바탕이 되어야지 그것을 중심으로 삼을 수는 없다. 물론 안철수는 책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 민주당과 유사하면서도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 운운하는 정치적인것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일반론적인이야기를 본인의 중심기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안철수는 비정치성에대한 의존인지 중독인지를 떨치지 못했다.

 “인간은일반적인 경우에는 잘 속지만, 구체적인 경우에는 잘 속지 않는다라는마키아벨리의 말은, 안철수가 여전히 일반적인즉 비정치적인 언어에 의존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속다라는 말이 너무 심하다면 설득당하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반적인 것,비정치적인 것은 쉽게 대중에게 효력을 미치는 초콜릿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실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허공에 뜬 말이기도 하다. 안철수가 정치인으로 대두된 지 1년 반이 지났지만, 그가 의존하는 것은 여전히 그런 말뿐이다. 1년의 숙고기간 동안, 최소한 지난 미국체류기간 동안에라도 구체적인 말 즉 정치적인 것을 고민해 전면에 내세웠어야 한다. 아마도 노력했지만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초콜릿의 달콤함에 너무 취해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대로는 정말 아니다. 솔직히 안철수의 언어는 면접장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만 어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에게도 정치적 행보를 마음껏 취할 자유가 있기에, 노원병 출마 등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공허한 소리는좀 그만하고 제대로 구체적인 콘텐츠 좀 채워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쓰디 쓴 한약을 먹든, 장기에 걸친 식이요법을 하든 좋으니까, 초콜릿은 이제 좀 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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